“처음부터 불법, 원래부터 무효였다.”
“허위문서, 날조된 비법문서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에 대한 설명들이다. 따로 쓰인 두 개의 문장이지만 하나로 연결해 읽어도 무리가 없다. 위는 남측, 아래는 북측 역사학자가 썼다. ‘경술국치’로 불리는 이 조약을 설명하는 데 남측은 ‘불법’, 북측은 ‘비법(非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상 같은 말이다.
경향신문이 확인한 최초의 남북 공동 역사서인 <남북역사용어공동연구>(이하 공동연구) ‘근대’ 편에는 한일합병조약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주요 사건들이 담겨 있다. 앞선 편들처럼 하나의 역사용어를 각자 정리한 뒤 ‘남’과 ‘북’을 표기해 함께 수록했다. ‘조선’과 ‘리조봉건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상해림시정부’, ‘러시아’와 ‘로씨야’ 등 용어와 일부 사관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각종 조약과 제도, 끊임없이 이어진 독립운동사를 조망하는 양측 시각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하나’로서 통과해온 긴 시간의 흔적이다.
■ 일제 침략, ‘데칼코마니’ 기술
일제를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
식민지 불법성 짚는 부분도 유사
<공동연구>의 남북 필자들은 모두 일제를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했다. 한일합병조약으로 ‘완전한 식민지’가 된 과정의 불법성을 짚는 부분도 유사하다. 남북은 고종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을사조약’에 따라 설치된 일제 통감부가 애초부터 조약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요에 의한 조약이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북측은 특히 당시의 강압적 분위기를 묘사하듯 상세히 기록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각각 있던 덕수궁과 창덕궁에 부대들을 배치해놓고, 황실과 황궁으로 드나들던 관리들을 위협하였다. … 일제는 합병 체결장소인 서울(에) 살벌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면서 시내의 곳곳에 헌병, 순사들을 조밀하게 배치해놓고 두 사람 이상 모여서서 이야기를 해도 단속하고 심문했다.”
한일합병조약에 앞서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에도 ‘데칼코마니’ 같은 기술이 등장한다. 남측은 이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북측은 “일본 침략자들과 리조봉건정부 사이에 맺은 침략적인 불평등조약”이라고 썼다.
■ 남측, “일제 침략 앞잡이 사살”…북측, “조선인민의 응당한 징벌”
이완용 등 의열투쟁의 표적들을
‘일제 앞잡이’‘친일주구’로 비판
남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관련한 사건·용어들도 주요하게 다뤘다. 의열투쟁의 표적이 된 이들은 “일제의 충실한 앞잡이”(남측), “친일주구”(북측) 등으로 규정하고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을사오적’이자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부분이 대표적이다. 북측 역사학자들은 1909년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 사건을 “매국역적 리완용에 대한 리재명의 대담한 습격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피눈이 되여 돌아치던 매국역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남측은 ‘을사오적’ 항목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완용을 ‘재앙의 우두머리’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남측 역사학자들은 1908년 장인환이 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사살한 것을 두고 “일제 침략의 앞잡이를 사살한 의거”라고 적었다. 북측은 “조선인민의 응당한 징벌”이라고 했다.
항일의병·독립군 등 무장투쟁에
북 “높은 형태의 운동”으로 칭찬
북측은 대체로 항일의병과 독립군 등의 무장투쟁을 “높은 형태의 운동”으로 봤다. 1910년대 독립군 운동을 ‘중국 동북지방과 로씨야의 연해주 일대’를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봉오골, 청산리 전투를 “독립군 운동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남측은 미주, 동만주·연해주, 서간도 등 지역별 독립군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3·1운동 뒤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기술에는 온도차가 있다. 북측이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한 편이지만, 남북 모두 임정의 취지와 한계를 함께 지적하는 방향성은 공유했다.
남측은 “27년이나 지속해온 ‘존재적 가치’는 있었지만 정부 수립 초기를 제외하고는 독립운동 최고기관이자 정부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한계가 분명했다”고 평가했다. 북측은 ‘상해림시정부’로 부르며 “현실성이 없는 독립로선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고 한 것으로 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한 개의 상층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역할밖에 수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