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00년

제82주년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추모제
<기억, 1923> -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
제21회 이사회 개최
차리석 선생 서거 76주기 추모식
애국지사 귀암 김용중 선생 서거 46주기 추모제
[빈섬 이상국의 뷰]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서훈 불가론을 논…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 김가진 독립운동 재조명
[책의 향기]서울서 독립운동 이끌던 김가진...상하이로 망…
[보도자료] 일흔 넘어 상해로 망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보도자료] [인터뷰] 이종찬 “임정기념관에 이승만부터 김…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개인이나 국가나 좋은 이웃을 만나 화목하게 사는 것은 축복이다. 선린(善隣)이란 말은 그래서 생긴 용어이다. 선린외교나 선린정책은 이웃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이고 정책을 말한다. 삼국시대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까지 몰려와 분탕질을 일삼던 왜구로부터 임진․정유왜란, 동학농민과 의병학살,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 만행은 끝이 없었다. 우리에게 그들은 항상 ‘선린’은커녕 도적이었다. 오죽하면 단재 신채호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의 서두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고 썼겠는가. 최근에 이르러 일본의 ‘거품’이 빠지고 한국이 정치․경제․문화․IT산업․군사력에 이르기까지 역전현상이 일어나면서 그들의 반한․혐한에 이어 적대 현상이 노골화되고 있다. 패전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던 우월감과 지배의식으로 깔보던 심리가 ‘추락의 시대’에 이르자 국제무대에서 훼방꾼 노릇을 하고, 각종 교과서에 고유의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국령으로 표기하는 등 날선 도발을 일삼는다. 향후 무슨 짓을 할지 우려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치 현관에 쓰인 조지 산타야나의 경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가닥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 당시 일본(정부)이 재일동포 6,661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은 순식간에 시즈오카, 야마나시로 파급되었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고 수십만의 인명이 부상했으며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신․전화․철도를 비롯하여 전기․가스․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져 가히 생지옥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부녀자를 강간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렸다. 대진재로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치 로마의 대화재 당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우고 그들을 학살한 정황과 비슷하였다. 유언비어 조작과 유포 경위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인 9월 1일 오후 일본 경시청은 정부에 진재 현장에 출병을 요청하고 계엄령을 준비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즈노 젠타로와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늦은 밤 도쿄시내를 돌아보고 다음날 도쿄와 가나가와현 경찰서 및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폭동’에 대한 전문을 만들어 내무성 정보국장 고토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경찰․군부․우익세력이 총동원되고 이른바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 신문들은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여 조선인 학살을 부채질하였다. 재일조선유학생회는 1924년 1월 대표 김건(金楗)의 명의로 〈도쿄진재 한인학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중 학살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 “하동(河東) 광장에 한인을 다수 포집하여 기천기백인을 한꺼번에 총으로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 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쳐부르는 한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狼)의 군(群)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1명의 동포를 수십인이 달라붙어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끌고다니면서 능욕하였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였다.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시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흡이 막힐 정도였다.” 이같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에서도 언급 없이 넘어갔다. 9월 1일을 법정추모일로 정해서 100년 동안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 유엔이 정한 제노사이드 정신을 받들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에 정부와 국회가 나서길 촉구한다.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일본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개인이나 국가나 좋은 이웃을 만나 화목하게 사는 것은 축복이다. 선린(善隣)이란 말은 그래서 생긴 용어이다. 선린외교나 선린정책은 이웃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이고 정책을 말한다. 삼국시대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까지 몰려와 분탕질을 일삼던 왜구로부터 임진․정유왜란, 동학농민과 의병학살,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 만행은 끝이 없었다. 우리에게 그들은 항상 ‘선린’은커녕 도적이었다. 오죽하면 단재 신채호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의 서두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고 썼겠는가. 최근에 이르러 일본의 ‘거품’이 빠지고 한국이 정치․경제․문화․IT산업․군사력에 이르기까지 역전현상이 일어나면서 그들의 반한․혐한에 이어 적대 현상이 노골화되고 있다. 패전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던 우월감과 지배의식으로 깔보던 심리가 ‘추락의 시대’에 이르자 국제무대에서 훼방꾼 노릇을 하고, 각종 교과서에 고유의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국령으로 표기하는 등 날선 도발을 일삼는다. 향후 무슨 짓을 할지 우려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치 현관에 쓰인 조지 산타야나의 경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가닥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 당시 일본(정부)이 재일동포 6,661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은 순식간에 시즈오카, 야마나시로 파급되었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고 수십만의 인명이 부상했으며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신․전화․철도를 비롯하여 전기․가스․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져 가히 생지옥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부녀자를 강간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렸다. 대진재로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치 로마의 대화재 당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우고 그들을 학살한 정황과 비슷하였다. 유언비어 조작과 유포 경위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인 9월 1일 오후 일본 경시청은 정부에 진재 현장에 출병을 요청하고 계엄령을 준비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즈노 젠타로와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늦은 밤 도쿄시내를 돌아보고 다음날 도쿄와 가나가와현 경찰서 및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폭동’에 대한 전문을 만들어 내무성 정보국장 고토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경찰․군부․우익세력이 총동원되고 이른바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 신문들은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여 조선인 학살을 부채질하였다. 재일조선유학생회는 1924년 1월 대표 김건(金楗)의 명의로 〈도쿄진재 한인학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중 학살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 “하동(河東) 광장에 한인을 다수 포집하여 기천기백인을 한꺼번에 총으로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 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쳐부르는 한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狼)의 군(群)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1명의 동포를 수십인이 달라붙어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끌고다니면서 능욕하였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였다.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시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흡이 막힐 정도였다.” 이같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에서도 언급 없이 넘어갔다. 9월 1일을 법정추모일로 정해서 100년 동안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 유엔이 정한 제노사이드 정신을 받들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에 정부와 국회가 나서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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