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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독립견문록 ⑨시안] 혈전 맹세한 광복군…한반도 침투 직전 日 "항복"-매일경제
글쓴이 관리자
날 짜
19-04-14 23:05
조회(9010)
#1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9/03/171817/ (3079)

`최전선` 시안엔 광복군 흔적
훈련지엔 수직에 가까운 절벽
일본 패전 선언에 광복군 허탈감
"광복군 목적은 연합군 지위 획득"


 


◆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⑨시안 ◆



정상을 바라보며 높이를 가늠하니, 족히 100m도 넘어 보였다. 좌측의 좁은 비탈길을 걸어 올라 로프를 묶은 채 뛰어내리길 반복했다고 했다. 조국에서의 혈전을 상상하며 투신을 기꺼이 감내했을 한국광복군 심정을 헤아리니, 경사진 능선은 사선(死線)인 양 두렵게 다가왔다.

중국 시안 소재 `한국광복군 미타고사 OSS 훈련지`에 지난달 17일 도착했다.


적막강산이었다. 용어부터 정리하자면, OSS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약어로, 한국광복군은 한반도 침투작전을 위해 시안시 미타고사 근처에서 OSS 훈련을 받았다. 미타고사는 훈련지 진입로에 위치한 사원의 옛 이름으로, 현재는 불교사찰이었다. 깎아질 듯한 바위산의 환영(幻影)을 바라보며 20분쯤 걸었을까. 굽은 진입로를 능선이 둘러치며 내부를 가리는 산세여서 천혜의 훈련지란 확신이 어렵지 않았다. OSS 훈련은 한반도 비밀침투 작전으로, 당시 극비였다. 넓은 중국 대륙에서도 OSS 훈련 장소는 왜 하필 시안이었을까. 한국광복군 연구자인 왕메이 시안박물원 부관장이 말을 이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는 지역이 시안이에요. 또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인이 화북지방에 거주했는데, 광복군 입장에서는 한인을 모집하고 선전하기에 적합한 도시가 시안이었죠."

1945년 8월 4일, 광복군은 OSS 훈련 제1기생을 배출했다. 일제 패전 선언을 11일 앞둔 시점이었다. 현대사의 흐름이 여기서 갈렸다. 하나의 질문이 불가피하다. 50명의 군인, 많아야 수백 명의 인원으로, 대미(對美)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어찌 이기겠단 의미였을까.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이 "낡은 오해"라며 우문에 답했다.

"광복군의 독립전쟁은 일본과의 `일대일 승부`가 아니라 연합군 지위를 획득하려는 유의미한 실천이었습니다. 일제 항복 후 광복군이 연합군 자격으로 국내에 귀국했다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우리 손으로 해낼 수 있었을 테죠. 광복군은 광복 후에 이방인이었어요. 친일 군인, 친일 경찰이 판을 장악하며 근본이 뒤틀리게 되었죠. 광복군 규모는 자조할 일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 아닐까요."

하산 이후, 시안 시내에 흩어진 한국광복군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1939년 11월부터 군사특파단이 주재하다 이듬해 1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된 장소인 시안시 북대가 통제방 일대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이부가(二府街)로 향했다. 이부가 29호는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사용한 건물로, 최근까지 법원으로 사용되다 올해 1월 이사를 갔다는 표식이 적혀 있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 한중 협의로 2014년 만들어졌지만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진설명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 한중 협의로 2014년 만들어졌지만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에 도착했다. 한중 양국이 협의해 2014년 5월 건립한 장소다. 대략 300평 규모의 소규모 공원으로, 비석의 문구가 선명했다. `중한 인민이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압박에 맞서 싸웠던 역사를 기념하고 항일 승리에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를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압록강 행진곡`이란 제목의 노래 한 곡을 재생시켰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이던 한유한 선생이 작곡한 곡으로, 한 세기 전의 노래임에도 처연하고 절절한 전주가 일품이다. 2005년 리메이크작으로, 가수 서문탁이 불렀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환희의 찬가였을까, 비극의 암송이었을까. 춘제(春節)를 맞아서인지 폭죽소리가 담을 넘었다. 폭죽소리를 포성 인 양 들으며, 목숨과 자유를 교환하려던 망자의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렸다.

■ 공동기획 : 매일경제신문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시안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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