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포군관학교 세워지자
조선 청년들 줄지어 입교
"혁명은 아직 성공 못해…"
쑨원 휘호 아래 뭉쳤지만
이념 희생양돼 한줌 흙으로
◆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⑥광저우 ◆
![황포군관학교 뒷산의 동정진망열사묘원에는 한국인 청년 2인의 비석이 놓여 있다. 꽃이 올려진 앞쪽 비석이 김근제, 뒤쪽 비석이 안태의 묘다. 조선 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항일의 선봉에 서고자 했으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아직 이국땅에 누워 있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https://file.mk.co.kr/meet/neds/2019/03/image_readtop_2019_125408_15514385703654312.jpg)

황포군관학교 뒷산의 동정진망열사묘원에는 한국인 청년 2인의 비석이 놓여 있다. 꽃이 올려진 앞쪽 비석이 김근제, 뒤쪽 비석이 안태의 묘다. 조선 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항일의 선봉에 서고자 했으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아직 이국땅에 누워 있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
바스러진 비석에서 `한국인`이란 세 글자부터 눈에 띄었다. `한국인 제2학생 김근제지묘(金瑾濟之墓)….` 글자마다 덧칠했던 붉은 페인트는 시간이 앗아갔고 음각으로 새긴 문자는 해독이 쉽지 않았다.
정적이 산비탈을 휘감았다. 중국 광저우시 황포군관학교 뒷산의 동정진망열사묘원에서 가장 깊숙한 학생묘역에 지난달 12일 올랐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과 반혁명세력인 천중밍의 싸움에서 맨 첫 줄에 섰다가 이승에서 멀어진 넋들의 마지막 휴식처다.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니 모두 66기였다. 이 가운데 확인되는 한국인 선열은 김근제와 안태(安台)다. 작고 당시 두 한국인의 나이는 23세와 28세. 피끓던 청춘은 왜 이국땅에 잠들었을까.
![지난달 12일 방문한 황포군관학교의 정문. 춘제 기간인 까닭에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문 좌우 양측에는 쑨원의 글귀가 적혀 있다. 광저우는 신해혁명의 발원지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https://file.mk.co.kr/meet/neds/2019/03/image_readmed_2019_125408_15514385703654313.jpg)

지난달 12일 방문한 황포군관학교의 정문. 춘제 기간인 까닭에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문 좌우 양측에는 쑨원의 글귀가 적혀 있다. 광저우는 신해혁명의 발원지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
황포군관학교를 비추는 렌즈는 1924년으로 향한다. 중국 국민당 창시자 쑨원은 국공합작의 군사 육성을 도모한다. 국민당 제안에 공산당도 화답한다. `광저우의 한강`인 주강(珠江) 인근 요충지에 군관학교가 세워지자 조선의 젊은이도 입오생(入伍生·예비생) 자격으로 문을 두드렸다. 김근제와 안태도 그들 중 일부다. 김근제는 후손을 찾았으나, 안태는 충북 괴산 출신이란 점 외에는 정보가 없다.
"원래 학생들 묘소는 바로 저기(묘역 우측 20m 거리) 보이는 야산이었어요. 시체를 묻으며 묘비만 세웠다가 수십 년이 지나 현재 모습을 갖췄죠."
안내원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니 중국 국민당 상징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태양 문양이 비석 상단에 어렴풋했다. 세월에 쓸려 비문조차 희미했다. 비석의 키는 제각각이었다. 깨지거나 부서진 것들을 그러모아 시멘트를 덧발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2월인데도 기온은 영상 22도였다. 중국인 비석에는 제사용 과일이 드문드문 놓였고, 바이주(白酒) 주위로 초파리가 웽웽거렸다. 김근제·안태 선생의 비석에도 미리 준비한 붉은 장미와 무궁화 조화를 한 송이씩 올려 고개를 숙였다.

묘원에서 나와 `황포군관학교 구지 기념관` 정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춘제 기간이어서 봄나들이차 들른 중국인들로 입구는 산만했다. 이곳이 해군 요충지인 까닭인지, 황포군관학교 정문 앞에는 현역 초계함 두 척이 정박해 있었다.
기념관은 `밭 전(田)`자 모양으로 이어 붙인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원래 모습을 잃었다가 재건했다. `1938년 일제가 폭격해 완전히 사라졌고, 1965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04년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나무 책걸상이 빼곡한 10여 개 강의실, 50~60명이 선잠에 빠졌을 공용 침실, 학교장 집무실 등이 천장이 뚫린 건물의 중앙 연못을 감싸는 구조였다. 출구를 향하며 뒤돌아보니 좌우 양측 벽에 쑨원의 휘호가 거대했다. 열두 글자였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계속 노력해야 한다(革命尙未成功 同志仍須努力).`
독립을 꿈꾼 한국인들은 무력으로서의 균형을 `혁명`이라 확신했을까. 재앙 속에서 저들은 단 하나의 또렷한 길을 발견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에서 온 혁명가들은 산화했을지언정 이미 이긴 것과 다름없었던 것 아닐는지.
![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는 사람의 키보다 큰 봉분 하나가 솟아 있다. 광저우기의 희생자들을 묻은 무덤으로 한 구덩이에 묻었다 한다. 이념의 파고에 쓸려나간 희생자를 위로하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https://file.mk.co.kr/meet/neds/2019/03/image__2019_125408_15514385713654315.jpg)

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는 사람의 키보다 큰 봉분 하나가 솟아 있다. 광저우기의 희생자들을 묻은 무덤으로 한 구덩이에 묻었다 한다. 이념의 파고에 쓸려나간 희생자를 위로하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
역사의 연옥을 배회했을 한국인의 넋은 광저우시 도처에 널려 있다. 광저우기의(廣州起義)열사능원으로 향했다. 1920년대 후반, 실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쑨원과 정치 노선을 달리한다. "일제는 피부병, 공산당은 심장병"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산당을 혐오한 장제스는 공산당, 그리고 `정당 안의 정당`이던 국민당 내 좌파 척결에 몰두한다. 황포군관학교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념의 통합에 균열이 생기자 공산당은 `낫과 망치`로 무장했다. 광저우기의는 결국 실패했고, 공산당은 후퇴한다. 이 시기에 황포군관학교 한국인 재학생 등 150여 명이 삶의 불청객이 되어 돌아갔다.
능원을 오르자 사람의 키 세 배, 가히 농구 코트만 한 봉분이 우뚝했다.
광저우봉기 당시 사망자들을 구덩이에 한데 모아 묻었다고 했다. 독립을 쟁취하고자 찾은 먼 땅에서 어떤 선열들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이념의 불신과 싸우다가 이국땅에서 스러졌다. 봉분 주변으로 열댓 송이 자목련이 메말라 떨어져, 핏빛의 죽은 새인 양 공원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목련이 떨어지면 봄이 온 거라지만, 이날 묘소는 유달리 서늘했다.
[광저우 =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