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Ⅴ-5. 포상을 거부한 독립운동가들
입력: 2005년 05월 09일 17:23:11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의 장인 김문갑(金文甲)씨는 일제시대 건국동맹 준비위원을 지내는 등 몽양 여운형과 같이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후에는 평화통일운동을 하다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허전장관은 “서훈 신청을 하시라고 권하니까 장인은 ‘몽양이 서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서훈 신청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며 “하지만 서훈 신청에 필요한 자료는 모두 챙겨놓았다”고 말했다. 허전장관은 올해 몽양이 서훈을 받음에 따라 장인의 서훈도 신청할 예정이다. 이렇듯 독립운동을 했지만 서훈 신청을 망설이거나 아예 신념을 가지고 신청도 하지 않고 산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 가운데는 몽양과 비슷한 정치적 노선을 걷거나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을 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올해 몽양에 대한 서훈이 이뤄지면서 같은 계열에서 활동했던 인사의 서훈 신청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종률(李鍾律)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중 우리말사건, 학생운동조직 성진회 사건, 1936년 형평사 운동으로 수차례 옥중생활을 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해방후 조선학술원을 창립하고 부산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89년 세상을 떠났지만 독립운동 서훈을 받지 않았다. 평소 그는 “박정희와 같은 친일파와 함께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통일운동가 박진목씨는 “이종률은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서훈을 신청할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본명 장지락)을 공산주의자로 ‘지도’한 승려 출신의 김성숙(金星淑) 선생도 마찬가지다. 김성숙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조선의열단 선전부장을 지냈다. 김구, 김규식과 임정을 조직해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이승만을 공개적으로 성토하고 27년 광동코뮌에 참여한 열혈 혁명가이기도 했다.
해방후 김성숙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에 매진하다가 57년 ‘근로인민당 재건사건’, 58년 ‘진보당 사건’ 등 이승만에게 정치적 보복을 당해 여러번 옥고를 치렀다. 김성숙은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한 동료의 집 마당 귀퉁이에 11평짜리 가건물을 지어 기거했다. 이것도 주변사람이 ‘비나 피하라’고 지어준 것으로 노산 이은상은 이 집에 피우정(避雨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김성숙은 말년에 병마에 시달렸는데 변변한 약은커녕 끼니도 잇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노(老)혁명가는 69년 쓸쓸히 죽었지만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에게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장건상(張建相) 선생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 인디애나대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상해 임정 외교총장, 북경대 교수 등을 지낸 인텔리 독립운동가다. 미국, 중국, 만주, 시베리아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북경에서 옥고를 치른 혁명가이기도 했다. 장건상은 해방후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몇번이나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고 이승만의 입각 제의도 거부했다. 대신 장건상은 여운형과 같이 정치활동을 하다가 이승만 정권에서 구속되는 등 보복을 당했다. 74년 그가 사망했지만 국립묘지 안장은커녕 모실 관을 마련하기도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 역시 생전에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가운데는 백범 피살후 이승만의 보수 제도권에 흡수된 사람도 있지만 국내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아예 제도권과 등지고 산 사람도 많다. 그들 역시 독립운동 노선이 달랐던 이승만과 친일파 박정희, 군부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이강(李剛) 선생은 64년 약병 몇개 뒹구는 판잣집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이강 선생은 하와이에서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창설하고 하와이 대동공보사 주필을 지낸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원로급이다.
하지만 해방후 정치권과 거리를 둔 채 광복동지회를 결성하고 남북통일촉성총연맹을 발기하는 등 통일운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는 말년에 4·19 혁명을 지켜보고 “조국에 희망이 있다”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역시 서훈 신청서를 쓰지 않았다.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 10인 서명자의 한 명으로 상해 임정 초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최근우(崔謹愚) 선생은 5·16 직후 쿠데타 정권에 의해 연행됐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최선생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유공자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이승만과 독립운동 노선을 달리했거나, 이승만에게 정치적 도전을 했거나,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아예 서훈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또 일부 인사는 일본 헌병출신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친일파와 같이 묻힐 수 없다는 신념으로 서훈 신청을 하지 않고 힘든 삶을 살았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위원장은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발굴을 주요 사업으로 꼽는다면 이런 사람들을 찾아 서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희복기자 wonhb@kyunghyang.com〉
◇ 공동기획 : 경향신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협찬 : SK주식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