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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경향신문>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윤봉길 의거에 중국인들 감사”
글쓴이 관리자
날 짜
08-09-19 14:07
조회(7926)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206170034… (4707)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윤봉길 의거에 중국인들 감사”
입력: 2005년 02월 06일 17:00:34
 
김자동씨(77)는 1894년 갑오개혁의 주체세력이자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동농 김가진의 손자다. 김씨는 조부 김가진이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는 바람에 28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김씨는 젊은 시절을 임시정부 그늘에서 보냈다. 역사책의 단골로 등장하는 독립열사들은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원수 대신 갚아줬다”김씨는 5세가 되던 해(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에 폭탄을 투거한 사건부터 기억해냈다. 그는 윤의사가 일본군을 혼쭐을 내줬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윤의사의 폭탄 의거가 일어난 후 임정은 더 이상 상해에 머물 수 없었다. 임정은 진강으로, 가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해 5월 김씨도 이시형, 이동녕, 박찬익, 조완구, 엄항섭 등 15명의 임정 요인들을 따라 가흥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중국 손문의 동지 추푸선이 1차 대전 이후 경제공황 탓에 잠시 폐쇄시킨 작은 방적공장에 체류했다. “상해 시절보다 더 나았지. 중국인들은 윤의사가 원수를 대신 갚았다며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줬어. 미주 동포들도 꼬박꼬박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줬다네.”

白凡 “어머니 보살펴달라”진강에 둥지를 텄던 나머지 임정 요인들은 남경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현상금이 걸려 남경에 머물던 백범 김구는 김씨의 모친 정정화에게 “어머니와 둘째 신(당시 13살)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청했다. 백범의 모친이 정씨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아버지는 가흥에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어머니와 나는 남경에 가서 백범 선생과 1년을 함께 살았다. 그동안 끼니를 밥 먹듯이 거르곤 했던 백범을 어머니는 정성스레 모셨다. 나보다 6살 위인 신 형과는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술회했다.

일본군 공포의 총소리중일전쟁(37년)이 일어나자 남경 임시정부는 호남성 장사로 후퇴하고 김씨의 가족들도 합류했다. 장사에서 5개월여 머물다 38년 광주로 옮겨갔다. 그때부터 김씨의 가족들은 광복까지 임정과 줄곧 함께 한다. 김씨는 100여명의 임정 식구들이 여관방을 빌려 근근이 살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방세의 압박으로 임정은 25㎞ 가량 떨어진 불산으로 이동, 청사를 빌렸다. 김씨의 부친 김의한이 임정 살림을 책임졌고 안살림은 정씨가 맡았다. 그는 모친 정씨 혼자 100명이 되는 식구들의 식사를 차리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살았다고 기억했다. 특히 홀아비 이동녕, 차리석, 송병조, 이시형 등은 지극히 모셨다고 한다. 불산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돼 또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그해 9월말 일본군이 광동성에 상륙했고 공포의 총소리가 천지를 가득 메웠다. 한달을 목선(木船)에 몸을 누인 채 강물 위를 떠다녔다. 삼수에서 유주로, 중경에서 기강으로. 2년여의 기강 시절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김씨는 “조완구 선생님은 시간 날 때마다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여름방학 땐 그에게서 국사를 배웠다”고 말했다.

“日 항복… 일어나자”45년 8월15일. 김씨는 광복을 중경 시내에서 맞이했다. 18세였다. 광복군이던 나동규가 박수를 치면서 들어왔다. “일본놈들이 항복했다. 다들 일어나시게.” 중경시에 폭죽이 터졌다. 김씨도 사람들과 흥분하며 시내 곳곳을 뛰어 다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해서 11월에도 수영을 했지. 그해 겨울은….” 그날을 회상하던 그의 눈이 깊어졌다.

김씨는 해방 후 1년 뒤 처음으로 고국땅을 밟았다. 49년 6월26일 서울 법대 재학 중 그는 돈암동에서 한 지인으로부터 백범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군. 현재 강북삼성병원 근방 경교장(백범 선생 거주지)에 갔더니 인산인해였어. 아버지 같은 분의 죽음에 며칠 밤을 지새며 울었네.”

김씨의 우려대로 곧 전쟁이 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 남아있던 한독당 요인 및 과학자들과 함께 납북됐고 그는 전쟁의 피해자가 됐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이다.

〈공동기획:경향신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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