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타이시’란 말은 일본 규슈 후쿠오카 지방 사투리로 ‘쓸모없는 돌’이란 뜻이다. 일본인들은 보타이시를 키우던 개나 고양이의 묘에 비석처럼 쓰곤 한다. 일제시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이 보타이시를 비석 삼아 개와 고양이 옆에 묻혔다.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휴가공동묘지에 가면 공동묘지 안쪽 애완동물 묘 옆에 보타이시만 덩그러니 놓인 조선인 묘지 37기가 있다.
이국땅에 처량하게 묻힌 이들은 후쿠오카현 지쿠호 일대의 탄광에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쿠호 탄광지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석탄 생산량의 50％ 정도를 생산했던 일본 최대의 탄광촌이었다.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돼 이 탄광에서 강제노역했다. 일제 광산주들은 조선인 징용자를 가혹하게 다뤄 수많은 이들이 숨졌다. 하지만 사망해도 장례식을 할 수 없었고 비석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밤에 동료를 묻고 그 위에 나중에 유골을 찾기 위해 폐광석을 올려놓은 것이다.
<일본을 걷다>는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한맺힌 사연이 남아 있는 곳들을 직접 찾아간 답사기다. 가해자인 일본은 외면하고 조국은 남북으로 갈려 신경쓰지 않았던 역사의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소개한다. 사진작가 이재갑씨는 1996년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 건축물을 찍다가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의 흔적을 15년에 걸쳐 돌아보고 이 책을 썼다.
그의 답사 기록 가운데 큰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 곳이 이 보타이시 묘역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맞아 1939년부터 해방 전까지 조선인 100만명을 징용했다. 그 가운데 11만명이 후쿠오카 41개의 광업소로 끌려갔다. 태평양전쟁 전선으로 끌려간 37만명 다음으로 많은 인원이었다.
이 후쿠오카 탄광 중에서도 아소광업이 운영하는 탄광은 가장 가혹한 곳이었다. 아소광업 요시쿠마 탄광에서 1936년 화재가 났을 때 불이 번질까봐 갱도 입구를 점토로 막아 갱도에 갇힌 조선인 25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한 끔찍한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이 탄광에서만 무려 1만명의 조선인이 죽거나 탈출하다 행방불명되었을 정도다. 이 아소탄광을 운영한 이가 일본 총리를 지낸 우파 지도자 아소 다로의 증조부였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한 것이고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그의 증손자인 아소 다로 총리에게 아소광업이 요시쿠마 탄광 위에 만든 아소이즈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원폭 피해는 일본인들의 무감각한 역사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죽거나 다친 피해자는 7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사망자 4만명(히로시마 3만명, 나가사키 1만명)을 포함해 7만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위로나 보상은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최초의 원폭 피해자란 것만을 강조해왔다.
이런 이중성이 원폭 상징물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인들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높이 8ｍ, 무게 30t의 상징물을 세우고 매년 기념식을 연다. 하지만 조선인 1만명이 죽은 것에 대한 추도비는 1979년 일본인 목사의 노력으로 모은 성금으로 높이 1ｍ 검은돌로 조촐하게 만들기 전까지 없었다. 지은이는 이런 비극적인 조선징용자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면서 “자유와 평화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며 “역시 답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