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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해방정국에서의 미․소는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글쓴이 관리자
날 짜
21-07-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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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서의 미․소는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한 나라의 국가 경영에서 역사를 잊는 것도 비극이지만, 역사 논쟁이 과열되어 국론이 분열되고, 진영의 논리로 비화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역사는 앞으로 가는데, 뒤만 돌아보는 것은 앞의 걸림돌을 보지 못하는 위험과 함께 동력을 잃고 퇴행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연옥에 들어갈 때 수문장 피에트로가 “뒤돌아보는 이는 되돌아 가리라.”(󰡔신곡󰡕 연옥편 9:130)고 충고했다.

 현재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논쟁, 곧 해방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은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에 대한 논쟁을 보노라면 실익이 없이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소련과 미국 모두 일본의 식민지에 남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점령사령관(Commander of Occupational Army in Korea)이었다. 소련이 진정으로 북한의 해방군이었다면, 남한이 정부 수립을 할 때까지 북한의 해방을 미루다가 남한보다 35일 늦게 1948년 9월 9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할 이유도 없었고, 그 3년 동안에 두 번씩이나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코바로 불러 면접 시험을 치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75만 명의 일본인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35만 명이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군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관동군이 최후의 항전을 위해 남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적어도 1946년 7월까지 계속할 것이며, 본토군이 항복하더라도 관동군은 항전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무장 해제가 주요 관심사였지 한국의 해방은 군인들의 관심사에서 빗겨 있었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른바 “포고령”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나는 이 포고령의 비교 분석을 처음 발표하여(1987) 논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에 이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무렵 나는 분명히 소련군의 포고령이 우호적이었으며, 미군의 포고령이 고압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글의 이어진 부분에서 그것은 문장[修辭]의 문제였지 양쪽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마침 그 뒤에 이어진 교과서 파동에서 진보적 필자들은 나의 진심과 관계없이 앞부분만을 인용한 것을 보고 나는 다소 당황했다.

 문제의 핵심은 문투가 아니라 진입군과 작성자의 성격이었다. 당시 미국의 포고령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지 장군의 참모들이 북상하는 함상에서 9월 2일에 작성하여, 9월 8일에 인천에 입항하기 하루 앞서 9월 7일에 쌍발 수송기로 서울 인근과 대도시에 공중 살포했는데, 철필 등사(가리방)였으며, 문장은 일본어였다. 24군단에는 이를 작성할 만큼 한국어에 능통한 장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가 국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포고령은 일본어라는 불쾌감과, 그 고압적인 문장에 마음을 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 다른 포고문은 태평양사령관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9월 7일자 포고문인데, 스스로 “동양의 시저”라고 생각한 그답게 참으로 “맥아더다운” 문장으로, 미군은 점령군임과 금지 사항을 엄혹히 적시했다. 문장은 영어로 썼기 때문에 식자들 사이에 알 만한 사람만 읽었다. 법조문처럼 전문 6조로 된 이 “포고령”은 소련군 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장군의 이름으로 배포한 “호소문”과는 격조가 달랐다. 그 호소문은 한글 경어로 북한 주민에게 배포되었다.

 그러면 그 문장의 형식과 문투와 언어만 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고,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이는 당시 미군과 소련군의 정치장교의 수준과, 수많은 위성국 통치의 경험을 가진 소련군과 미군 장교의 기술의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 남북한의 진입 당시 소련군에는 슈티코프, 로마넹코, 레베데프 등 백전노장의 장군급 정치국원이 배속되어 순무(巡撫)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엄혹한 점령군이었다.

 그와는 달리 미군은 저들에 필적할 만한 정치장교를 갖추지 못했고, 한국에 남아 있던 선교사의 아들들을 긴급 차출하여 군속으로 만들어 고용했는데, 그때는 이미 포고령이 발표되어, 한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는 “해방”이지 “독립”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하지 사령관은 결코 포악한 사람은 아니었고, 한국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진심으로 고민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며, “내가 상부의 지휘를 받는 군인이 아니었다면 연봉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가 거친 성격의 인물이었음은 사실이고, 미국 육군사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일리노이주의 고아원 출신인 그는 유소년기에 너무 거칠어 고아원 보모가 성질 좀 부드러워지라고 가운데 이름을 “Reed”(갈대)라고 지어 주었다.

 그런 성격의 사령관 밑에 조력자가 필요하자 미국은 뒤늦게 1946년 초에 버취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나이 35세에 계급은 중위였다. 하버드 출신인 그는 자신이 마치 신생국 창설의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며, “내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출세한 중위”라고 호언하였으나, 연해주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 대장의 군사위원으로 경험을 쌓은 슈티코프 상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어느 쪽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소련의 노회함과 미국의 서툰 대결에서 미국이 비본질적인 결함으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자, 그러니 어떻게 이 갈등을 풀어야 하나? 양쪽 주장에 다 할 말이 있고, 모두 결함이 있다. 이 싸움은 누가 이길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득책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덮고 멈추어야 한다. 잊을 수 없지만, 역사는 화해를 가르치는 것이지 적개심의 도장은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당시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못난 탓이었고, 그 허물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이 글은 2021년 7월 9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시론을 확장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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