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승동(한겨레 문화부 기자)
7월21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우파 정당들이 예상대로 압승했다. 6년 임기의 참의원 총242석 중 절반을 교체하는 이번 선거 결과 자민당 의석은 기존 84석에서 115석으로 크게 늘었다. 반면 민주당 의석은 86석에서 59석으로 급감했다.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연립 정당인 공명당의 20석만 합쳐도 과반을 훌쩍 넘는데다, 개헌에 찬성하는 다함께당과 일본유신회 의석까지 합치면 헌법개정 발의에 필요한 정원 3분의 2선인 162석까지도 확보할 수 있다. 개헌 발의에는 중의원·참의원 모두 총의석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중의원은 집권 자민당과 그 우당들이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압승해 이미 그 선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참의원에서도 그 선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다만 20석을 지닌 공명당이 연립정당이긴 해도 개헌 자체에는 신중한 편이어서 자민당·다함께당·일본유신회 의석 142석만으로는 개헌 발의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개헌 요건을 정한 헌법 96조를 개정하더라도 통치기구 관련 내용만 의원 과반수 찬성을 적용하고 논란 중인 9조와 기본법 등은 기존 3분의 2 찬성 요건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식의 타협 제스처를 취하고 있어, 상황에 따라서는 공명당이 거기에 동조할 수도 있다. 불교집단인 일본 창가학회의 정치조직인 공명당은 한국 등 동아시아에 상당한 포교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데, 공명당이 개헌에 찬성할 경우 한국·중국 등지의 일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나빠져 공명당 토대인 창가학회의 포교전략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공명당은 그런 점에서도 개헌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행 96조는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개헌 발의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의회에서 개헌을 발의하면 국민투표를 거치게 된다. 비록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개헌 발의에 필요한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기가 쉽지 않은데다, 설사 개헌발의가 된다 하더라도 국민투표를 통과할 가능성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최근 여론조사로는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국민들이 크게 늘긴 했지만 군대 보유와 교전권(집단자위권 발동) 부정 등을 규정한 헌법 제9조를 개정하자는 여론은 여전히 과반 미달 상태다. 이 헌법 9조 개정을 통해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재무장하는 것이야말로 아베 등 일본 보수우파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미국이 짠 틀에 예속된 ‘전후체제 청산’의 핵심고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베가 개헌에 좀 더 신중한 접근자세를 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개헌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끊임없이 개헌 찬성 여론을 부추기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런데 개헌을 하면, 헌법 제9조를 바꾸고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재무장을 하기만 하면, ‘일본의 문제’가 풀릴까? 일본에게 만사형통이 될까? 그렇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일본은 오히려 이제까지보다 더 한 곤경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그 여파로 동아시아 전체가 엄청난 ‘일본 리스크(위험부담)’를 떠안게 될 가능성이 높다.
패전 뒤 일본은 한국전쟁 이후의 고도경제 성장기를 거쳐 1980년대 거품(버블)경제 때까지 장차 미국을 대체할 차기 패권국가로 지목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미국 사회학자 에즈라 보겔이 쓴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 1979)의 예언은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대와 함께 일본의 조락은 예상외로 일찍 시작됐고, 10년의 장기불황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조어까지 낳았다.
1997~8년 외환위기와 함께 처음으로 정권까지 내어준 한국 보수우익들이 도용해 잘 써먹은 ‘잃어버린 10년’은 1989년 ‘쇼와 천황’ 사망과 후계자 아키히토 천황의 등극과 때를 같이해서 시작돼, 아키히토 치세의 연호인 헤이세이를 붙여 ‘헤이세이 불황’이라고도 한다. 그 10년의 불황이 20년이 되면서 ‘잃어버린 20년’이란 말까지 나왔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 장기불황, ‘잃어버린 20년’이 2007년에 물러난 아베를 다시 불러들였다. 장기불황과 전망 없는 일본에 절망한 일본 유권자들은, 1955년 보수합동 이래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의 짤막한 비자민연립 정권 시기를 예외로 하면 사실상 장기 일당체제를 계속해온 자민당을 버리고 민주당을 택했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압승해 사실상 처음으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민주당은 바로 그런 일본 유권자들의 절망과 희망이 연출해낸 작품이었다. 유권자들은 전망 없는 자민당과는 다른 뭔가를 보여주기를 민주당 정권에 기대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총리로 이어진 민주당 정권은 그런 유권자들 요구를 들어주는데 실패했다. 보수우파들의 끈질긴 방해공작과 이대로 가다가는 오키나와 기지 등 동아시아 교두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와 일본 보수우익 지원 속에, 그것을 돌파해 나갈 능력과 비전을 갖추지 못했던 민주당 정권은 일본국민들에게 자민당보다 더 큰 환멸만 안겨주었다. 일본 국민은 ‘아베노믹스’라는, 당장의 불황을 타개해줄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완화정책’, 탈 디플레와 환율인상과 기업 규제 완화 정책을 들고 나온 아베의 자민당을 다시 선택했다. 현실정치에서는 그것밖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파들은 열광했고 중도·진보는 좌절했다.
과연 재등장한 자민당은 앞으로 승승장구하고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헤이세이 불황이 시작된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냉전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쇼와시대가 종말을 고한 1989년은 바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냉전 해체가 시작된 해다. 1990년 들어서면서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은 무너졌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됨으로써 현실 사회주의 실험 70년은 실패로 마감됐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얘기하며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얘기하던 그때부터,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와 더불어 끝간데 없을 것 같았던 일본의 전후 번영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거품(버블)은 꺼지고 장기불황이 시작됐다.
패전국 일본의 이례적인 전후 번영은 냉전체제를 빼 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냉전의 한쪽 극인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인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안보전략의 핵심 교두보로 일본을 지목하고 지원·육성했다. 한국의 산업화를 가능케 한 미·일동맹과 동아시아의 ‘엔 경제권’은 이런 배경 하에 등장했으며, 그것은 일본 장기번영의 토대이기도 했다. 소련과 중국과 북한, 베트남 선으로 대륙과 해양세력이 갈린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일본을 지키는 요새로 설정된 한국은 물론 멀리 동남아·서남아까지 아우르는 미·일 대륙 봉쇄전략의 핵이요 지역 맹주였다. 미국은 그런 일본만 컨트롤하면서 활용하면 만사형통이었다.
하지만 냉전붕괴와 함께 그런 세력구도가 유효성을 상실했다. 거대 중국이 문을 열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며 단기간 내에 일본을 대체할 지역 맹주로 떠오르고 있다. 냉전적 질서 붕괴와 더불어 중국과의 교역을 급속도로 증대시키고 있는 동남아와 한반도의 위상도 냉전기의 지역 맹주, 절대 강자 일본을 더는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미국이 보장해주는 일본이라는 맹주에 자본과 기술과 시장을 완전히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승승장구해 온 일본 전후 번영의 토대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걸 의미한다. 미국은 급성장하면서 자국 패권체제에 도전세력이 될지도 모를 중국을 적절히 견제하는데 필요한 보조세력으로 일본을 앞으로도 중시하겠지만, 냉전시기처럼 자신들의 동아시아 안보·경제전략을 일본에만 의존하진 않을 것이다. 미국에겐 중국이 새로운 선택지로 등장했다. 애초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하면서 중국대륙에 친미정권이 들어서기를 고대했고, 그럴 수 있도록 장제스를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대륙 대신 미국은 일본에 집착했다. 이미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추월한 중국의 위상이 더 커질수록 미국은 이를 한편으론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럴수록 미국에게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등의 영토분쟁을 통해 당분간 일본과 중국 간의 갈등을 즐기면서 중국 견제에 일본이란 카드를 종종 활용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주거래 대상을 중국으로 교체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 우파 지배세력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이래 근대 일본의 번성을 뒷받침해 준 것이 바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열강들과의 독점적 제휴관계였는데, 그 지위를 중국 또는 다른 어딘가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일본 우파 지배세력의 공포는 외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아베의 자민당 정권은 바로 이런 위기의 일본, 경제적으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장기불황에 시달리고, 안보군사적으로 중국에 추월당하고 있지만 무능한 국내 정치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아베노믹스와 개헌을 앞세우면서 “우리에겐 일본을 구할 비법이 있다! 과거의 영광과 긍지를 되찾을 방법이 있다! 다시 강한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외치고 있다. 이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대다수 일본국민들은 긴가민가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그들을 선택했다.
그러나 냉전 해체와 더불어 이미 냉전전략에 편승한 일본 ‘전후 번영’의 토대가 근본적으로 허물어진 상황에서, 냉전적 사고와 구조를 상정한 과거로의 회귀가 ‘일본의 문제’를 풀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칫 일본의 조락을 더욱 앞당기는 화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베노믹스가 단기 효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아베가 꿈꾸는 일본의 옛 영광,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설계한 55년체제, 보수합동의 냉전형 장기번영을 보장하진 않을 것이다. 냉전붕괴 20년이 지나도록 여전한 남북간의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대결이 만들어내고 있는 한심한 한반도 상황이 아베 등의 일본 우익들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원군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일본의 반동 복고를 밀고 갈 에너지를 채울 수 없다.
일본 보수우파는 변화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근대와 전후 일본의 독보적인 영광은 긴 아시아 역사에서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서세동점과 냉전체제라는 이례적인 단기변동의 산물이었다. 이제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망하리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일본은 지배그룹의 대처 여하에 다라 앞으로도 풍요를 누리면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맡을 수 있다. 다만 패권국의 지원을 받는 독보적 지역 맹주가 아니라 보통의 중견국가로서.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과거 회귀 환상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고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하고, 자신이 패권국이 되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패권국, 패권체제의 등장을 막는 길을 지역 중견국들과 함께 모색하며 연대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게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다. 그런 전환기적 고통을 감수할 생각 없이 아베식의 달콤한 판타지에 계속 집착한다면 오히려 고통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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