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기 독립정신 답사단 日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 가다 - (3) 일본의 독립운동 사적지(하) 가나자와·교토ㆍ오사카
일본인 교수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의 산 속 깊숙이 있는 미쓰비시 동굴 군수공장 입구에서 독립정신 답사단원들에게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독립정신 답사단이 셋째날인 7월 21일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600여km를 달려 도착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가 있다. 25세의 조선인 젊은이,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를 감행한 후 현장에서 체포돼 오사카로 이송됐다. 그해 12월 19일 오전 7시25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가나자와 육군작업장 숲속에서 순국했다. 당시 일본인 사수와 부사수 2명이 10m 거리에서 십자가에 묶인 윤 의사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윤 의사는 이마 중앙에 총알을 맞,고 그자리에서 절명했다.
암장지서 200m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극비리에 암장한 일본군은 윤 의사의 유해를 항상 감시 할 수 있도록 야전산(野田山) 육군묘지 언덕과 시영묘지 경계의 비탈진 길 바닥에 암장했다. 그로부터 14년 후인 1946년 3월 2일 윤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은 토박이 주민과 종교인 증언을 중심으로 찾아 나섰다. 이튿날 오전 9시30분부터 윤 의사 유품이 하나둘 발견됐다. 지표면에서 4-50cm 정도 땅을 파자 사형시킬때 묶었던 십자가가 제일 먼저 나타났고 다음에 관을 발굴했다. 옷과 신발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들이 수습됐다. 오후 4시까지 뼈조각 201개는 찾아냈으나 7개는 영원히 찾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발굴단은 고문 후유증으로 손끝이 닳아 없어졌거나 나무 뿌리에 스며들었다고 판단했다.
야전산 자락에서 수습한 윤 의사 유해는 가나자와 시내 조선청년연맹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모신 후 도쿄 일본 왕궁 앞에서 만세 3창을 외치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윤 의사 유해가 고국으로 귀환하기 전 윤 의사 유해는 일본인들로부터 철저히 모독당했다. 일본인들은 유해 위를 마구 걸어 다녔고, 온갖 쓰레기를 태우며 매케한 악취를 풍겨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윤 의사 암장지에서 10m 언덕 위에 일본 육군묘지 관리소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 육군묘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주변 경관이 수려하지만 윤 의사 암장지적비는 아주 좁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했다.
윤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재일 조선인 박인환 선생과 시민단체인 ‘윤봉길 암장의 유적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자연석으로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를 세워 놓았다.
암장지에서 200m 남쪽 산자락에는 의거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를 세워 그의 순국을 추모하고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순국기념비도 일본 우익의 파렴치한 행동을 피해가지 못했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우익들이 윤 의사 순국기념비 해설에 ‘대륙침략기’라는 글자를 파괴해 놓아 가슴이 아팠다.
윤 의사 암장지에서 20여분 거리에는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곳이 있다. 일본 최대 군수업체 미쓰비시중공업 군수공장 노역현장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정신 답사단 대원들은 조선 노동자 600여명이 산 속 깊은 곳까지 도로를 내면서 이동한 흔적을 따라 걸었다. 70여년 전 깊은 산속 습한동굴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절규하는 조선 노동자들의 환상이 떠 올랐다.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닦아 놓은 이 길을 따라 걷는 답사단 대원들의 가슴에는 파블로 피카소 명화 ‘게르니카’의 숨막힐 듯한 공포가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강제 징용 조선 노동자들은 이곳이 항공기 엔진 조립 공장이라는 사실도 모른채 힘겨운 삶을 살았다는게 더욱 안타까웠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원시림에 갇혀 있는 군수공장으로 가는 길 옆에는 아름드리 삼나무가 빼곡하다.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 갈 수 있는 길은 누더기 옷처럼 너덜너덜했다.
독립정신 답사단 대원들이 15분쯤 걸었을까? 길 오른쪽으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동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구는 반쯤 막혀 있고 안쪽을 들여다 보니 규모가 엄청나다.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 갈 수록 대형 동굴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하루 만두 한개로 허기를 때우며 소나 말처럼 노역에 동원됐다.
미쓰비시는 가나자와 지역에만 200여곳의 동굴 군수공장에서 조선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동굴 공장은 연합군의 일본 대공습도 피해갔다.
윤동주 시비 앞 ‘참회록’ 가지런히
동굴 군수공장 앞에서 만난 다무라 미츠아키 일본 호쿠리쿠대 교수는 “1945년 7월부터 이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산한 항공기 엔진은 미쓰비시 나고야 군수공장으로 이송했다”면서“당시 일본의 패망으로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교토에 도착한 답사단은 동지사대학의 윤동주ㆍ정지용시비를 찾았다. 나란한 두 시비 앞에 선 대원들은 잠깐동안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할 말을 잃었다. 저항시인 윤동주 시비 앞에는 그의 대표작인 ‘참회록’이 액자에 넣어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은 시비 앞에서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두 시인의 거룩한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미래 동북아시아 주역이 될 대학생 답사단은 22일과 23일에는 오사카대공습 교바시역 폭격 피해자 위령비를 비롯해 조선총독폭압정치 반대 투쟁지, 오사카 조선인 거주지역 츠루하시, 오사카성, 전쟁상흔기념비 등 오사카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둘러 보며 과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