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946년 1월께 ‘자살동맹’에서 살포한 신탁통치 반대 삐라. 미국, 소련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그들 모두를 무찔러버리고 자살해 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해방공간 시기(1945~48년)의 ‘삐라’(전단)들을 처음 집대성한 자료집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소명출판)가 최근 발간됐다. 근대 문헌 수집가인 김현식(대일광업 전무)씨가 30여년 동안 모은 컬렉션 443건을 원본 그대로 컬러인쇄하고 본문을 현재 쓰는 문장으로 풀었다.
이 자료집을 보면, 당시 집회 현장 등에서 뿌려진 삐라는 모두 조악한 갱지에 활판 또는 등사형식으로 인쇄돼 그 시절의 열악한 경제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발간·배포 주체는 조선노동당,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 서북청년단, 건국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한국민주당 등 익히 알려진 단체들 외에 자살동맹, 민주학생돌격대, 철권대 등 생소한 단체들도 많다. 이승만, 김구의 개인성명, 유진오·백남운 등 유명인사 연명의 성명서들도 눈에 띈다.

삐라는 성명서, 선언문, 호소문, 결의문, 격문, 경고문 등의 표제를 달고 있으며, ‘동포여! 삼천만 동포에게’ ‘동포에게 소함’ 등 호소 대상을 부르거나 ‘~하자!’ ‘ ~하라’ ‘~의 진상’ 등 내용을 요약한 방식도 보인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구성,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임정요인 귀국, 신탁통치 결정, 이승만의 정읍 발언 등 해방공간의 주요 이슈들을 둘러싼 좌우익 정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주류이다.

연대별로는 1945년 8~12월 5개월 동안 150종이 발행되어 ‘주장의 봇물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218종이 뿌려졌는데, 미군정이 법령 제72호를 발령해 유언비어 유포나 포스터, 전단 단속을 시작한 5월2일 이후로는 76건으로 급격히 줄었다. 1947, 48년은 각각 41건, 34건으로 대부분 우익, 관변단체가 발행한 것들이다. 특히 46년 5월 이전 뿌려진 삐라들은 미군정청 단속으로 미디어 환경이 ‘멸균상태’로 바뀌기 이전의 상황을 날것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정선태 국민대 교수는 자료집 해제를 통해 삐라는 “좌우익이 대립하면서 상대방을 원흉, 앞잡이, 개나 돼지로 몰아 철퇴, 처단, 박멸하자는 등 소통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수사가 많다”며 이런 일방적인 주장들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징후로 읽힌다”고 분석했다.

삐라 자료들을 공개한 김현식씨는 “해방공간의 만화, 잡지에서 한두장 발견한 뒤 재미가 있어서 30여년간 청계천 현장경매나 인터넷 경매사이트 등을 통해 700여가지나 되는 삐라를 모으게 됐다”며 “모은 삐라들 가운데 유사하거나 중복된 것을 빼고 자료집에 실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