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강제병합 조약 무효 한·일 지식인 선언 1주년 학술회의


“일제의 1910년 한국병합 조약은 불의부정한 행위이며 원천 무효다.” 지난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일 지식인 1000여명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1년이 지나, 경술국치일인 29일 한·일 지식인들이 다시 모였다. 이들은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성명 발표 1주년을 기념해 ‘한국병합 조약 무효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화해 및 새로운 미래’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의 의의는 한국병합 조약의 정치적·국제법적 무효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아시아 지식인 공동선언으로 확대하고 나아가 세계 지식인의 지지를 받는 형태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특히 올해는 2차 세계대전 청산과 함께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구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60주년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와 책임을 물었지만, 이를 뛰어넘어 ‘식민지 범죄’의 책임을 묻는 작업이 전 세계적인 흐름이며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영호 한·일지식인 공동성명 참가자회의 공동대표(단국대 석좌교수)는 개회사를 통해 “오늘날 중국의 패권주의화를 막기 위해서도 과거 아시아의 패권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의 행동은 한국 민족주의, 반일의식보다 아시아 평화협력시대 혹은 ‘시빌 아시아(Civil Asia·아시아 시민 공동체)’의 열린국제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취지에 맞춰 이번 회의에는 나카쓰카 아키라 일본 나라여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 등 한·일 지식인 외에도 중국 베이징대 슈용(徐勇) 교수와 호주 국립대 개번 매코맥 명예교수가 참석했다.

매코맥 교수는 일본 식민주의가 전 세계적인 국가 간 적자생존 질서와 사회진화론적 개념에서 형성되었음을 지적하며, 오늘날에도 또 다른 형태로 변질돼 존속하고 있는 미국식 식민주의가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식민주의는 1945년 이후에도 존속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세계 제국에 편입된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식민주의’가 됐으며 오늘날 한·일은 다같이 미국의 군사주의·제국주의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800년 동안 동아시아가 몽골·중국·일본·미국 중심의 지배 질서가 계속돼왔다면, 이후에는 식민주의나 패권주의, 제국주의가 아닌 진정한 연방체제의 형태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코맥 교수는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에 있어 일본의 오키나와, 한국의 제주 강정마을을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키나와는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강정마을은 미군의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높은 해군기지 건설로 홍역을 앓고 있는 곳이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본 일본과 제주에서 본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라며 “해방 이후 일본이나 한국은 우선 미군정의 대상이 된 이후 미국의 간접적인 지침을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방위나 억제를 명분으로 하는 기지 건설이 일본이나 한국 정부의 중요한 정책목표가 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민의가 무시되거나 짓밟히는 경우 그들은 역설적으로 군을 우선으로 하는 북한식 선군을 채택하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양국이 새로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역사뿐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코맥 교수는 “오키나와 헤네코와 제주도 강정에는 급진민주주의, 비폭력 그리고 평화주의의 분명한 요소를 갖고 있는 듯하다”며 “양대 투쟁은 현대 반식민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슈용 교수는 칼을 찬 군인 복장의 시민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나서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 일이 유럽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매년 발생하고 있다”며 “과거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가려는 것인지 걱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원했으며 전후 청산 문제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며 “그러나 전후 국제법의 기본원칙은 전쟁이나 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따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학자들은 공동선언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는 “최근 3년간 방영되고 있는 NHK의 대형기획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을 보면 청·일, 러·일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일본의 조선 침략 움직임은 모두 무시하고 있다”며 “이런 일을 계속하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참사도 포함해 가슴속이 어둡게 가라앉는다”고 밝혔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병합조약이 당초부터 무효라는 한국 측 해석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게 하려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며 “새로운 해석에 따라 지난 36년간 양국의 법률관계가 혼란스러워질 우려나, 일본 정부가 추가적인 보상에 나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다가와 고 와세다대 객원교수는 근본적으로 인간무시의 근대화, 끝 모를 부국강병의 추구가 일본의 침략 역사뿐만 아니라 최근 후쿠시마 핵 참사로 이어지는 공통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명의 전환을 위해 시민이 정치를 움직이는 정치문화의 전환이 요구되며, 한·일 지식인이 평화와 공생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