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는 흔히 우리 문학사의 암흑기였다고 간주돼 왔는데, 섬세한 수사학적 시각에서 가치론적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친일로 분류된 작가들의 작품조차 저항과 독립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45·사진)가 10년간의 성과를 모은 연구서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예옥)를 펴냈다. 일제 말기는 1937~1945년으로, 작가들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면서 국책을 지원하는 글이나 일본어문학이 등장하던 시기이다. 이런 엄혹한 환경에서 작가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문학작품을 생산해냈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 연구서의 취지다.

저자는 우선 ‘친일’ 대신 ‘대일협력’이란 표현을 쓴다. 친일은 드러난 행위와 내면의 동기를 뭉뚱그려놓은 개념인데 비해 대일협력은 행위만을 가리킴으로써 개인의 갈등이나 양심, 의지를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하게 친일로 매도했던 작품 가운데 가치 있는 문학을 발견하고, 그 시대의 표정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룬 작가들은 임화 이태준 이효석 김기림 이광수 이상 김남천 채만식 박태원 김사량 오장환 조지훈 등이다.
임화의 경우 일제 말기에 학예사에서 펴낸 <조선문고본> 20권 발간과 <개설조선신문학사> 집필에 가치를 부여한다. 임화는 고전문학자 김태준과 협력해서 원본 ‘춘향전’을 비롯해 상당히 중요한 고전을 발간했는데, 이는 민족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정체성을 재구성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임화는 ‘고전의 세계’라는 수필에서 ‘기댈 것 없는 사람에게 기억은 아름다운 희망보다 즐겁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설명인 셈이지요.”

이효석의 소설 <벽공무한>이나 <풀잎>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이효석은 일제 말기 일본어로 소설을 썼고, “대일협력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는 ‘친일’과 다른 그의 내면을 볼 수 있다. <벽공무한>의 주인공은 서양문화가 활발하게 수용되는 중국 하얼빈에 가서 교향악단을 초청하고 러시아 여자와 연애를 한다. 음악이라는 보편 문화를 추구함으로써 일제의 지배논리인 동양주의에 반발했던 셈이다.

박태원은 대표적인 친일작가로 꼽히지만, 소설 <자화상 연작>의 한 편인 <채가>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주인공 복상은 집을 짓기 위해 일본인에게 빚을 졌고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전주의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룬다. 일본인의 경제력에 종속된 스스로를 창씨개명한 박씨인 ‘복상’이라고 부르며 자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일제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

이상과 오장환, 조지훈이 보여준 퇴폐(데카당스)의 미학 역시 일제 말기 문학의 중요한 줄기다. 문화가 쇠퇴하는 국면에서 나타나는 데카당스는 시대의 우울을 자신의 방랑적·위악적 행위로써 증명하는 방식으로, 작가들은 의도적인 방황과 타락을 통해 사회적 현실에 대해 애써 눈감고 암흑의 역사를 건너온 것이다.

방 교수는 “일제 말기 문학 작품들에서 가치 있는 사유를 발굴해서 우리 문학자원으로 새롭게 등록하는 일이 갖는 의미”를 강조한다. “암흑기라고 하면서 다 갖다 버리는 태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작가와 작품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필 때 그 시대를 깊이 이해하고 균형잡힌 평가를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