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8월 18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반쪽의 역사만 다루는 임정 복원사업
20년 노력 좌우연합정부로 통일한 과정 외면…남북긴장 완화에 교훈 삼아야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의 임정유적지 답사단이 지난 5일부터 15일까지 상해, 항주 가흥, 남경, 광주, 유주 계림, 기강 중경 등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재현했다. 답사단은 60명의 대학생과 50명의 유족, 학자, 취재진 등 모두 110명으로 구성됐다.
중경과 남경은 ‘중국의 3대화로’라고 불리는 곳이다. 연일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답사단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이번 답사단은 찾은 현장은 다음과 같다.
(1)상해지역- 임정청사,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과 기념관, 송경령 능원
(2)가흥 항주지역- 가흥 매만가 김 구 피신처, 임정요인 숙소
(3)진강 남경지역- 남경대도살기념관, 태평천국역사박물관
(4)무한 장사지역- 생략
(5)광주 불산지역- 황포군관학교, 광주기의열사능원과 중조인민혈의정, 중산대학
(6)계평 유주 계림지역- 유주임정기념관, 계림 칠성공원 내 조선의용대 본부자리
(7)기강 중경지역- 기강 상승가 임정가족 숙소, 기강 임강가 임정청사 자리, 중경 임정청사, 중경 광복군사령부터, 중경 화평로 임정청사 터
26년 역사를 가진 임시정부의 흔적은 양자강 남쪽 지역 10여개 도시에 남아있다.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중국 지방정부의 노력으로 임정청사나 임정요인 가족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고 있다. 모든 토지는 국가소유이고, 개인은 임대만 할 수 있는 중국헌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건물이 없어진 곳에는 기념 표지석이라도 세워지고 있다.
상해 임정청사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절강성 가흥시내 김 구 피난처와 가족 숙소, 광서장족자치구 유주시 내 임정기념관, 중경시 임정청사 등 6곳에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은 한국 독립기념관의 재정지원으로 마련되었다.
임정 법통 잇는다는 ‘헌법전문’ 못살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남북긴장완화와 통일대업의 완수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더구나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중국 내 6곳의 임정 관련 전시관은 이런 뜻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9년 만에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는데 첫 번째 의미가 있다. 그 힘은 해외에 존재했던 수많은 독립운동단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1920년대에는 존재가치조차 상실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행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해군 대장 시로가와를 처단 한 후 임시정부는 1941년 2월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8년 10개월 동안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임정과 의거를 주도한 백범 김 구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26년간 임시정부 간판을 유지했다는 기록도 갖게 됐다.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활동 덕분에 실천이 안 되어 빛이 바랬지만, 카이로선언(1943. 12. 1)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는 열강으로부터 망명정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해방 직전 600여명 규모였던 광복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지만, 일본군과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했다. 단지 일부 광복군이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45년 5월부터 미군OSS로부터 훈련을 받는데 그쳤다.
1940년 초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연안에 진출해서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조선독립동맹(김두봉)이 조선인 2000여명으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화북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과 비교된다.
임정세력은 38선 이남으로 국한해서 볼 때도 대중적 기반으로 따지면 몽양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미치지 못했다. 재력과 행정력에는 일제하 개량주의자, 친일경찰조직과 손잡은 이승만 세력에 비교가 안됐다.
양자강 이남 독립운동단체 통합
그러나 임정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20여년의 노력 끝에 양자강 이남의 좌우진영과 중도, 무정부주의자 등 대부분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사실일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해야할 것은 바로 임정으로 모였던 세력들이 시도했던 통일을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중국 내 임정기념관에는 이런 내용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있다.
중경은 한국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안 진시황릉, 장강삼협, 장가계 등과 연결되는 교통요충지다. 많은 관광객이 중경에 와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번 답사단에 참석한 대학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을 한 분들의 정신에 머리가 숙여지지만, 이렇게 초라한 임시정부를 왜 대한민국이 이어받아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1995년에 복원한 중경청사에 전시된 내용을 보면 헌법전문의 정신에도 맞지 않고 역사학계의 연구수준도 반영하지 못한 저급한 수준이다. 다른 5곳의 전시관도 비슷한 수준이다.
중경청사의 임정연표를 보면 ‘1942년 10월 통합의회’ ‘1944년 4월 임시정부 제5차 개헌(주석 부주석제)’라고 단순나열하고 있다. 좌우합작정부 수립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구절은 단 한 곳도 없다.
임정 약사를 보아도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다당합작을 통해 정부의 조직을 확대 강화’ 수준이다.
심지어 연표에는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행동 9개준승 승인’이라는 내용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 줄 적혀 있다. 이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광복군에 재정지원을 하는 대신 지휘권을 가져간 것이다. 좌우연합정부는 1944년 8월 24일 끈질긴 노력 끝에 9개준승을 취소시켰다. 임정연표에는 작전권을 되찾은 기록은 없고, 작전권을 빼앗긴 기록만 있다.
임정관련 전시물이 모두 백범 김 구를 중심으로 제작된 것도 개선할 점이다. 특히 좌우연합정권 성립에 한 축을 형성했던 약산 김원봉은 ‘임정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정도로 평가 절하되어 있다. 김원봉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지에는 표지석조차 없다.
15일 광복절기념식을 하기 위해 중경 임정청사를 방문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올해 취임해 살펴보니 독립기념관에도 ‘의병 토벌’과 같은 수준의 기록들이 많다”며 “보완을 하려니 예산이 문제”라고 어려움을 말했다.
신명식 기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5-08-23 10:02:3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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