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8월 18일자에 실린 기사 입니다.
남북에서 평가 절하된 약산 김원봉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좌우연합 성사… 48년 월북 후 숙청
약산은 1898년 경남 밀양사람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길림성에서 1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등의 암살과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같은 일본 관청의 파괴를 지휘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출범한 황포군관학교에 1925년 약산을 비롯한 의열단원 12명이 입학했다.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출신 교관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간부를 양성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난 후 19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무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을 벌였다.
김원봉은 1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개석 정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한편 약산과 동향으로 의형제 사이인 윤세주는 1941년 봄과 여름에 걸쳐 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연안으로 진출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노선의 차이로 갈라섰다고 보지만,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를 조선의 독립에 활용하려는 통일전선의 일환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는 양자강 이남의 좌파진영을 이끈 지도자였다.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건설, 조선혁명군 창군이 김원봉의 과제였다. 그는 1942년 이후 임정에 참여해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제1야당 노릇을 했다.
해방을 맞아 고향을 찾았을 때 3만 인파가 ‘의열단장 김원봉 장군’을 환영했다. 약산은 해방정국에서도 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백범을 중심으로 하는 한독당은 이를 거부했다.
미군정에 쫓기던 약산은 1948년 봄 월북했다. 이해 5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주석단에 참여했다.
북한정권에 참여해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냈다. 1958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경력 때문에 약산은 남북한 모두로부터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1944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약산의 부인 박차정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활동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부산에는 그녀의 동상이 있고, 생가도 복원됐다.
신명식 기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5-08-23 10:02:5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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