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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1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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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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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공장·가게 운영해 군자금 모은 역사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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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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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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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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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09 2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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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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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주소 : http://kopogo.kr/bbs/tb.php/writing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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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북지역 항일무장투쟁지 답사기 8월12일(8일째) 정만기
중국에서의 독립군들은 날마다 전투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군과 전선을 마주한 최전선 태항산은 하북성과 산서성에 걸쳐 있다.
이 하북성 섭현에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와 독립동맹 태항분맹에서 운영하던 병원과 방직공장과 가게가 이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무정장군은 늘어나는 독립군을 위해 1943년 3월 ‘자력갱생하여 풍의족식(豊衣足食)하자’는 구호아래 태항산 하남점에 자본금 2천원으로 대중병원을 세웠다.
병원관계자는 네명으로, 40년 하반기 백단대전 때 포로가 되어 이곳으로 온 백은도 의사가 원장겸 내과를, 43년 자원해서 의용군에 참여한 김상현 의사가 부원장겸 외과를, 42년 임분 주둔 일본군에서 탈주해온 김희원·이화림 지원병이 제약과 간호를 맡았다.
이들은 전투 중 부상당한 의용군과 중국군의 치료와 주민진료를 병행하며 군자금 마련까지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가난한 중국인의 무료진료까지 수행해 지금도 마을주민들은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옛 대중병원자리는 이제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이 인연으로 인해 그 골목에는 보건소 비슷한 의료시설이 들어서 있다.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지 시골이라 좁은 가정집을 개조해 환자를 맞다보니 진료대도 따로 보이지 않았다.
골목에 길게 늘어앉은 엄마들 품에 안겨 링거를 맞고 있는 천진한 아기 모습(사진3)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편, 방직공장도 세워 천을 짜서 옷감을 팔고 그 수익금으로 조선의용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三·一상점에서는 중국인을 상대로 가게를 운영하며 의용군에게 생필품을 조달했다. 그리고 독립투사들이 모이는 곳이면 항상 학교가 세워졌다.
지난번에 소개한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는 중원촌에 있었고, 남장촌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교장 무정) 자리가 남아있다.
지금은 유치원으로 쓰이는 이곳은 44년 1월 조선의용군
의 주력이 연안으로 이동한 후에도 태항산으로 속속 들어오는 조선인 청년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그해 9월 문을 열었다.
대중병원이 있는 하남점에서 1.5㎞ 떨어진 남장촌의 낡은 절을 수리하여 썼다. 생도수는 293명이었고, 수준에 따라 고급·중급·저급반으로 나뉘어 학습과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학생자치와 문화구락부활동, 그리고 농산물의 생산도 함께 했다.
우리 답사단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무정장군의 통신병으로 전투현장을 함께 누빈 王小安(79세. 사진2)옹은 자신이 16세부터 3년 동안 모신 일을 어제처럼 생생히 증언했다.
이제는 순례지가 된 이곳의 방명록(사진1)에는 “지금 우리의 행복이 공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는 가슴 뜨거운 감동들이 적혀 있었다.
가족과 생이별 한 채 맨손으로 이국땅에 건너간 독립투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렇게 온몸으로 일하며 군자금을 마련하여 훈련받고 수시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러야 했다.
내 나라에서 내 가족을 위한 사회생활도 힘들다고 했던 자신을 뒤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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