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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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중국인들이 추앙해 온 3열사
글쓴이 코리아
날 짜
07-09-09 22:42
조회(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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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북지역 항일무장투쟁지 답사기  8월13일 (답사 9일째)    정만기


오늘로 중국화북지역 항일무장투쟁지 공식답사는 끝이 난다. 마치 한달은 족히 넘은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가슴 한쪽에서는 아쉬움이 고개를 내민다. 좀더 공부를 하고 왔더라면 더 많은 의미를 깨달았을 턴데.....
답사 중 기억에 남는 특강들
엊저녁 숙소에서 들은 특강이 좀더 새록새록 떠오른다. 화성 병점고 이호헌 선생의 ‘중국현대사의 흐름과 항일무장투쟁사’는 우리의 답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원로 언론인 주섭일 선생의 ‘프랑스의 나치 대청산과 한국의 친일청산 실패’는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파일럿 예비역출신 금기연 장군의 ‘동물적 반응을 삼가는 마음공부법’은 오랜 여행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고견을 가진 각계의 인사들과 함께 다닌 이번 답사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시골마을 중국인들이
관리해 온 4열사 묘소
그 옛날부터 중원이라 불리던 황하와 북경 사이의 평야지대를 버스로 몇 시간을 가로질러 찬황의 평촌마을에 이르렀다. 누런 황소와 송아지가 정겹게 시냇물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정경이 마치 정지용의 향수를 떠 올리는 모처럼 정겨운 동네였다.
나지막한 다리 앞에 우뚝 서있는 비석은 조선의용군 태항산지구 순국선열기념비(사진1)였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평촌인민정부가 지난 2002년에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마을 같은 동네를 들어서니 마을주민들이 길을 안내한다.
태반의 남자들은 웃옷을 벗어 구릿빛 몸통을 드러낸 채(근육질 몸매 전혀 아님, 볼록한 배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자태 그대로)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을 뒷산 전망 좋은 4열사 묘소(사진2) 앞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11일 화북지대 제2대가 하북성 원씨현 후가장에 주둔해 야영 중 일본군 5백명의 기습으로 포위망을 뚫다 산화한 박철동,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본명 이정순)열사가 잠들어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일본군에 맞서 함께 싸운 조선의용군의 기백을 높이 사 네 분 열사들을 지금껏 모시고 있다.

박철동(朴喆東 一名 張傑, 張淸吉, 1915.~41. 12. 12)
충북인, 충주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한 후 일경의 감시를 받는 주요인물로 지목되어 31년 2월 중국 심양으로 탈출했다.
33년 야학에서 남경 조선혁명당 동지 소개로 10월 초에 남경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탈출한 후 34년 1월 낙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1년 반 만에 졸업한 그는 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그 해 당의 명령으로 화남에 파견 도중 복건 천주나루터에서 일군에 체포됐다. 일본으로로 압송되어 큐슈 감옥에서 3년 옥고를 치렀다. 38년 가을 출옥해 고향에 머무르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의 운성으로 탈출해 애국청년들을 모아 반일 활동을 전개하다 39년 낙양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입했다.
41년 12월 12일 하북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 후가장(侯家莊)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손일봉(孫一峯, 1912. ~ 41 .12. 12)
평북 의주인. 31년 중국 청도로 가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일원으로 반일활동에 참가했고, 상해에서 한국인 밀정을 제거하는 활동을 했다.
또한 그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의거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다. 34년 중앙육군군관학교 군관훈련반에 입교하여 35년 졸업하고, 10월에는 중앙육군군관학교 광동 제4분교에 재입학해 38년 졸업했다.
그 후 포병 53단에서 활동하고, 포병 56단에 파견되어 간부훈련단 교관 및 탄약대장을 역임했다. 다시 포병 54단에 파견되어 전차방어포 연장을 역임하면서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 일대의 대소 전투에 수차례 참전했다. 40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재1전구 사령부에, 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분대장으로서 하북 적후공작을 전개 중 후가장에서 산화했다. 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철호(崔鐵鎬, 1915. 6. 19~ 41. 12. 12)
대전인. 35년 중국 남경에서 혁명활동에 참가, 38년 5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제6기로 졸업, 한구지역 조선청년전시복무단과 조선의용대 제1·5전구에서 대적선전사업에 종사했다.
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과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西安辦事處) 주임에 임명되었다. 41년 조선의용대는 적후방의 혁명무장대오를 건립키 위해 대적선전과 유격전을 치뤘다.
후가장 전투 중 적탄에 전사했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정순(李正淳 一名 王現淳, 漢大成, 1918.~41. 12. 12)
평북 벽동인. 33년 중국 남경 의열단 간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2기생으로 졸업했다. 그 후 의열단의 중앙당 연결 업무를 맡아 활동했고, 36년 2월 민족혁명당 조직 검사국의 직원으로 활동했다.
광동국립중산대학부중 및 중원중학에서 수학하였으며,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 훈련반을 38년 5월 졸업했다. 이어 조선의용대에 입대 해 제2지대에 배치된 뒤 상북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40년 남악으로 이동, 유격훈련을 마친 뒤 화북지방에서 임무를 수행 중 후가장에서 전사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열사의 선혈은 조선의용군의 밑거름
조선의용대는 후가장 전투의 박철동, 손일봉, 최철호, 이정순열사와 이듬해 마전전투의 진광화, 윤세주열사등이 일당백의 전투신화를 세워 중국8로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선의용군으로 진용을 갖추게 된다.
특히 한·중·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신출귀몰한 조선의용군의 적구(敵區)공작은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였고 중국민에게는 전의를 심어주는 촉진제가 되었다고 한다.

열사능원의 앞자리에 모셔진 주문빈 열사
중국인민해방군화북군구열사능원에서 또 한명의 전설을 만났다. 아버지 김기창, 형 김승호·영호,동생 김상호와 함께 다섯 부자가 중국에서 항일혁명운동에 참여한 주문빈(周文彬, 본명 김성호, 1908~44)이 바로 그다.
평북 의주출신인 그는 7살때 가족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뒤 20년대 중반 사회주의자가 됐다.
이후 고등학교도 마치기 전에 중국 공산당의 지시로 ‘주문빈’으로 개명, 탕산(唐山) 치동·천진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36세의 나이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희생됐다.
화북성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주도한 ‘국제주의 전사’라 불리운 그는 힘겨운 조선독립군에게 안식처와 중국요인의 연결통로 역을 언제나 자청해 한·중 양국의 고위 인사로 추모(사진3)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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